blank

결혼식 소회 #1

볼빵 2016. 3. 31. 21:52


아내의 제자들이 관현악 합주를 해 주었다. 양가 어머니 화촉점화, 신부입장, 퇴장 등등에 아내가 직접 선택한 곡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달랑 하나, 신랑 입장곡을 고르게 되었는데...


처음엔 아내가 이런저런 신랑 입장곡들 샘플 5개 정도를 내게 알려주면 내가 선택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식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나 내게 샘플이 전달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원하는 곡을 골라 악보를 찾아야 했는데, 악기 편성이 여럿이라 이른바 총보가 필요했다. 아니면 미리 편곡 작업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아내가 준다던 샘플을 기다리다가 결국 내가 원하는 곡을 고르지도 못하고, 편곡할 시간도 없이 시간만 헛되이 지나고 말았다.


처음엔 그냥 샘플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을 선택하려 했다. 최소한 가장 마음에 덜 안드는 곡이라도 고르려 했다. 그러나 샘플조차 받지 못하고 시간만 지나버렸다. 물론 아내는 자신의 과실을 사과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건 어쩔 수 없다.


결국 흔해 빠진 곡으로 결정했다.






아내는 흔해 빠진 곡이라 미안하다고 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들어보는 곡이었다. 이 곡이 딱히 마음에 안든건 아니었지만, 내가 원하는 곡을 고를 수 없었고 시간에 떠밀려 할 수 없이 고르게 된 곡이라서 마음이 상했다.


사실 나는 해리 코닉 주니어의 "It Had to be You"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걸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다음날, 당시 큰 인기였던 '응답하라 1988'에서 해당 곡이 꽤 큰 비중으로 나와서 좀 빛이 바랬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총보 비슷한 악보까지 결국 구글링해냈지만, 결국 위 곡으로 신랑 입장을 하게 되었다.


"너는 자신이 원하는 곡으로 잔뜩 채워 놓고, 나는 달랑 하나 골랐는데 그거마저도 못하고 마음에도 안드는 곡으로 정해버린게 말이 되느냐"며 매우 언짢아한 덕분인지, 아내는 그 이후로 결혼식 영상들에서 신랑 입장곡이 흘러 나올때마다 "흔해 빠진 곡이라 미안하다"며 자꾸 사과 및 셀프 디스를 한다. 그냥 마음에 담아둘 걸, 괜히 미안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서운하게 된 셈이다.


오늘은 문득 신랑 입장곡으로 군대 기상나팔을 썼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B급 정서가 떠오른 김에 이 글까지 적게 되었다. 흔해 빠진 곡으로 입장하느니, '잠에서 깨어 새로운 인생의 막을 연다'는 마음가짐으로 기상나팔을 신랑 입장곡으로 썼다면 어땠을런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군 복무 중 기상나팔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다. 남들은 기상나팔소리에 자동반응 한다지만, 사실 나는 아니다. 다만 내게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있는데, 화재출동, 구급출동, 구조출동 벨소리다. 한번은 텔레비젼에서 화재출동 벨소리 비슷한 효과음이 나서 순간 깜놀 했다가 그 자리에 있던 소방관들과 함께 뭐 이런 프로가 다 있냐며 욕을 하고는 채널을 돌려버린 적도 있었다.


여기에서 누군가에겐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음악을 개인적인 재미를 위해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기상나팔은 신랑 입장곡에서 기각이다. 해리 코닉 주니어가 자꾸 아쉽다. 할 수 없지 뭐.